지리산 둘레보고

그만 내려 놓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만 차마 내려놓지 못하는 것들이 있다.
미련인줄 알면서도 갈등을 하면서 결정하지 못할 때면 덕양전이 생각난다.
구형왕릉과 덕양전의 전설을 되새기며 찾아가는 그 길에 쓸쓸함이 묻어난다.

국가를 다스렸던 왕의 위폐가 모셔진 곳이라고 하기에는 호젓한 분위기이다.
문을 들어서면 또 다른 문이 멀리 보이고, 여러 채의 건물들이 장관을 이루고 있건만
사람의 흔적은 찾아보기 힘들다.

누각으로 된 문을 지나서야 제례를 모시기 위한 덕양전을 만날 수 있었다.
예를 갖추기 위해 가지런히 늘어선 돌들이 사람들 대신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화려한 모양으로 엄숙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가락국의 양왕은 사후에 붙여진 이름이다.
없어진 나라의 마지막 왕은 살아있는 동안은 물론 죽어서의 처지까지 걱정을 했을 것이다.
왕으로서 고뇌와 인간적인 두려움이 사당을 감싸고 도는 것 같았다.

양왕과 왕후는 이곳에서 마지막 여생을 마쳤고, 결국 이곳에 무덤을 만들고 위폐를 두게 되었다.
자신이 사랑했을 나라를 스스로 포기해야 했던 그의 마지막 결정의 순간은 어떠했을까?
그가 걸었을 발자취와 그의 시선을 따라본다.

구형왕 부부가 나라를 신라에게 양도한 후에 마지막 여생을 보냈다는 수정각과
죽어서 위패를 안치된 영정각은 그들의 삶의 마지막과 사후를 보여주는 듯 하다.

단단했던 비석들은 세월의 풍파를 견디지 못하고 조금씩 부서져 갔다.
천 년이 넘는 세월은 아무리 단단한 물건이라도 깍아 내는데 사람의 마음도 그처럼
아픈 부위를 깍아 내고 치유가 되었으면 좋겠다.

구형왕의 살아있을 때 집을 찾아봤다면 이제는 죽어서의 집을 찾아볼 차례.
망국의 슬픔을 온몸으로 겪었을 그의 무덤은 어떤 모양을 가지고 있을지
산을 오르는 길조차 비범하게 느껴진다.

패망의 아픔과 백성에 대한 걱정이 앞서던 1000년 전의 왕이 이곳에 잠들어 있었다.
수많은 돌이 쌓아놓은 그의 무덤은 나라를 스스로 닫고자 했던 그의 마음만큼이나 무거워 보인다.

한스러움, 고뇌, 백성에 대한 걱정, 안위에 대한 고민, 미래에 대한 불안 조상에 대한 사죄를 담고 있는
그의 마음을 달래기 위해 후손들이 덕양전을 짓고 사자와 돌상을 얹었다.
천년을 뛰어넘는 아픔이 손끝을 지나 가슴을 매만진다.

구형왕은 죽은 이후에 양왕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어찌보면 나라를 양도한 임금이라는 치욕적인 이름이겠지만 이미 망국의 길을 들어서
나라의 백성들을 생각하여 뼈아픈 결정을 내려야 했던 그의 고통을 누가 이해할 수 있을까?

구형왕의 고뇌와 회한의 눈물은 결국 위대한 역사의 강줄기가 되었다.
늦은 가을 저무는 해가 덕양전을 비춘다.
기울어가던 나라를 품고 있던 그도 저 가을 하늘의 붉은 노을처럼 타는 듯한 이상을 꿈꾸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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