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둘레보고

지독히도 ‘무심함’이라는 병을 앓던 시절,
뜨거운 삶의 모습들을 보여주어 내 삶의 의미를 찾는 여정을 시작하게 만든 책.
소설 지리산의 이병주 선생을 만나러 간다.

목적이 있는 여행은 여정 중에도 한가지 생각에만 집중할 수 있다.
‘기록자로서의 소설가’라 불리는 이병주 선생을 만나러 가는 길에
선선한 바람과 하늘거리는 코스모스가 약간은 무거웠던 마음을 가볍게 해준다.

어렵지 않게 찾은 이병주 문학관. 규모가 크다고 생각했다가 얼른 생각을 고쳐먹게 된다.
평범한 사람의 일생을 기록한들 저보다 작은 집에 기록이 가능할까?
심지어 작가의 삶을 기록하기에는 아무리 큰 집도 작을 것 같다.

언론인으로서 삶을 살다가 늦은 나이에 데뷔를 한 이병주 선생의 흉상의 시선은
선생이 가졌던 역사에 대한 희망을 담고 있는 듯 했다.
방관자가 아닌 기록으로 지식인의 역할을 다하고자 했던 그의 삶 앞에서 숙연해진다.

작게 만들어 놓은 디오라마지만 그 장면의 의미를 알기에 더욱 가슴이 아려오고,
비극적인 역사 앞에 초라하게 스러질 수 밖에 없었던 개인들의 삶이 떠올라 눈가가 촉촉해진다.
그저 호기심으로 바라볼 수 없는 작은 존재들.

선생은 한 달에 천 장의 원고를 쓰면서도 자신의 생각을 더 많이 써내지 못함을 한탄했다고 한다.
수없이 써내려 갔을 원고에는 지우고 다시 쓴 흔적들이 그의 고심의 흔적처럼 남아있다.

한 사람의 인생의 흔적이 고스란히 있었다.
손가락을 움직이는 것으로도 선생의 작품들을 찾아볼 수 있다는 것에 어두운 밤 원고지에
고뇌의 흔적을 썼을 작가를 생각하며 세월의 무상함을 느낀다.

평범한 친구의 말에서도 간혹 나를 깨우치고 가르칠 만한 것들을 발견할 때가 있다.
하물며 선생의 작품 속 어록들은 쉽게 발을 떼지 못하게 하는 의미가 있다.
사진을 찍어서라도 그 의미를 되새겨 보고 싶은 욕심을 내본다.

느릿하게 넘어가는 가을 해가 그를 기념하는 문학비를 비스듬하게 비추었다.
아름다운 산하이다. 선생이 증언하고자 했던 그 시기에도 산하는 변함이 없었건만,
다른 것은 사람뿐이라는 생각에 나서는 발걸음이 묵직해진다.

살다 보면 이기적으로 사는 것이 현명한 방법이라고 스스로 다그치는 나를 발견할 때가 있다.
나 말고 다른 것에 대한 관심을 거두고, 심지어 나에 대한 관심조차 게으르게 느껴질 때.
거대한 강물과 같은 글을 만나야 한다.

너의 가치는 무엇인가? 지식인으로, 생활인으로서 너는 무엇을 증언하고, 무엇을 지키면서 살아갈 것인가?
선생이 수 없는 고뇌의 흔적을 통해 던지는 질문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들판을 바라보는 나의 시선도 바뀌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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