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둘레보고

빠른 것이 부지런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며, 느린 것이 게으름은 아니다.
느림의 삶 속에는 빠르게 지나치는 삶보다 더 많은 사색과 상념이 깃든다.
토지길을 한걸음씩 걸으며 도도한 역사의 물결과 개인의 삶을 생각한다.

섬진강의 도도한 물줄기는 빠르기 보다는 거대한 물줄기로 넉넉하게 대지를 적시는 풍성함으로 기억된다.
강물이 대지를 적시고 흐르는 길을 따라 사람들의 삶은 만들어지고 역사의 태동이 이루어졌다.

학은 무리를 지어 나는 것도 아니고, 빠르게 오르내리지도 않지만 다른 새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고고함이 있다. 결국 역사의 물줄기도 평범한 개인들의 삶이 모여진 것.
도도히 흐르는 역사의 물줄기에 한 방울의 물방울이 되고 싶다.

‘서희나무’와 ‘길상나무’라 불리는 소나무는 몸을 기대지는 않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그 무엇으로 이어진 것 같다. 대지를 바라보며 서있는 두 그루의 웅장함에 압도고
넉넉한 시선으로 대지를 바라보는 애정 어린 시선을 느낀다.

땅이 욕심의 대상으로 변할 때 사람들 사이에서 갈등이 생겨난다.
그러나 누구라도 황금물결을 이루고 있는 들녘을 바라볼 때면,
그 넉넉함 앞에 작은 욕심이 부끄럽게 느껴진다. 땅은 부의 상징이 아닌 사람들의 삶 그 자체이다.

소설 속 최참판댁이 현실에서 버젓하게 자리 잡고 있는 느낌은 가상과 현실을 혼동케 한다.
숱하게 많은 밤을 지새게 했던 그 공간 속으로 들어가 나를 설레고 분노케 했던
인물들의 시선으로 너른 들녘을 바라본다.

마루를 걷는 동안 콩콩거리며 뛰어다니는 아이들의 재잘거림과 어른들의 헛기침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그 마루에 앉아 멀리 산하를 바라보던 어른들은 변화와 지킴에 대한 번민을 떨치지 못했으리라.

최참판댁과 비교되는 소박한 삶의 모습들이 무거웠던 마음을 가볍게 해준다.
넉넉하게 열린 감 송이에도, 외양간에 묶여있는 송아지의 안쓰러운 울음소리도
땀 흘려 일한 농부의 편안하고 달콤한 낮잠을 이끌어 낼 것 같다.

‘조부자집’은 거대한 규모와 함께 작은 지혜와 정성에도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정원을 걷고 있는 동안 만들어진 곳이 아닌 원래부터 그렇게 생긴 것과 같다는 착각을 불러온다.
잘 만들어진 정원을 자연의 이치를 옮겨 놓은 곳이다.

바위에 자리잡고 수백 년의 삶을 살아온 문암송은 한 순간도 바위를 깨뜨리고 억누르지 않았다.
오히려 포근하게 감싼 소나무의 쭈글쭈글한 뿌리는 억세지만 나를 안을 때면 포근하게 감싸주던
아버지의 팔뚝과 거친 손마디를 생각나게 한다.

한 그루의 거대한 소나무는 사실은 열 한 그루의 나무들이 군락을 이루어 살아가고 있는 공동체이다.
어울림과 경계의 완벽한 조화 앞에 할 말을 잊는다.
어울려 살아가는 것이 아름답게 보인다면 그 삶들이 얼마나 가치 있는 것일까?

들판의 1년은 사람의 일생과 같다. 여린 잎사귀들이 모여서 한여름 고된 햇볕을 버티더니
황금의 수확기를 맞이했다. 찬란한 시절이 지나면 모든 것을 내려놓을 겨울이 오겠지만 찬란했던
황금의 물결은 모든 것을 잊게 할 만큼 풍성하고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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