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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양문화원

지리산, 그리고 사람

김성진 원장 사진

김성진 원장

함양 함양문화원 선비의 고장 함양
경남 함양은 일찍부터 '좌안동우함양'으로 불릴 정도로 기개가 바른 지식인들이 많이 배출된 선비의 고장으로 유명하다.
김성진 원장 사진
그런 이유로 유서 깊은 향교과 서원, 누각, 정자 들이 곳곳에 세워졌다.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에 세워진 정자와 누각은 예향으로서의 멋과 기품을 전해준다. 그중 일두 정여창선생을 기리기 위해 세운 남계서원이나 문민공 김일손을 모신 청계서원은 함양을 대표하는 서원으로 유명하다. 천년의 숲 함양 상림은 신라 진성여왕 때 최치원이 함양태수로 와서 조성한 인공 숲으로 사람들에게 낭만적인 쉼터를 제공한다. 또 화림동계곡을 비롯해 용추계곡, 칠선계곡, 백무동계곡 등 수려한 자연경관도 볼거리다.
문인이자 향토사학자인 김성진 함양문화원장은 함양에 대해 이렇게 얘기한다. "옛날 조선시대부터 양반의 고향으로 알려져 있어요. 좌안동우함양이란 말도 그때 생겨난거죠. 함양은 선비들이 정신적인 면을 중요시했어요. 유교사상을 철저히 지키려는 실천유학을 강조했죠. 판서 같이 높은 지위의 관직에 나간 사람도 많았지만 다 보면 가난하게 살았어요. 집도 작아서 부자가 없었어요. 안동 하회마을과 같은 99칸의 고택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죠. 어떤 분은 장례비가 없어 임금이 보낸 부의로 장례를 치렀다는 기록도 있어요. 공직에 있어도 정말 정직하게 산 사람들이 많았던거죠." 조선시대 영남 유림의 본산을 좌안동우함양 즉 경북 안동과 경남 함양으로 구분했다.

경북 안동은 퇴계 이황, 경남 함양은 남명 조식 선생이 주류를 이루었다. 훗날 그 문하생이 학맥을 이어왔다.
"우함양의 남명 조식은 행동하는 지식인이 되도록 가르쳤죠. 실천유학을 강조한거죠. 그 문하생들인 곽재우, 김면, 정인홍, 최영경 등이 의병에 나선 것도 비슷한 맥락인거죠. 그러나 당파싸움이 치열했던 조선시대에는 정치적으로 적도 많았어요. 계축화옥, 인조반정을 거치면서 조식 문하생이 거의 소멸되었어요. 조선후기에는 관직에 나갈 수 없게 되자 모두 지역에 머물며 후학을 키우게 되었던 거죠."

함양에는 고택도 많다. 함양군 지곡면 개평마을이 대표적이다.
이곳에 일두 정여창 고택뿐만 아니라 노사초 생가, 노참판댁 고가, 하동 정씨 고가 등 100가구가 남아 있다.

그중 일두 정여창 고택이 대표적이다. 정여창 선생은 1450년 지곡면 개평리에서 병마우후 통판공 육을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영민했고 훗날 김종직이라는 훌륭한 스승을 만나 학문을 깊이 닦았다. 연산4년 무오사화에 연좌되기 까지 안음현감으로 있으면서 선정을 베풀었다고 전한다. 일두 정여창고택은 KBS드라마 '토지'의 촬영지가 된 곳으로도 유명하다.

"옛날 총리께서 이곳 정여창고택을 보고 이집을 짓는데 얼마나 백성이 고생을 했겠냐고 흠담을 하셨어요. 그때 제가 옆에 있다가 이렇게 말씀드렸죠. '이 집은 정여창 선생의 할아버지가 하동에서 옮겨오면서 지은 집이지 정작 정여창 선생은 잘 몰랐을 겁니다'라고."

상림 숲
김성진원장과 함께 함양의 대표적인 상림 숲으로 향했다.
"상림 숲은 인공 조림으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숲입니다. 신라 진성여왕때 최치원이 이곳에 태수로 왔어요. 그때 지은 것인데 원래 강물이 이쪽으로 바로 흘렀던 것인데 홍수가 잦았어요. 강을 서남쪽으로 돌려서 둑을 쌓고 나무를 심어서 숲을 이룬 거죠. 당시로선 대단한 지혜였고 큰 역사였어요.

물줄기를 돌린다는 것이 지금도 어려운 일인데." "함양 상림이 대단한데, 숲 가운데로 물이 흘러가거든요. 위천입니다. 강을 막아서 물이 숲으로 흐르도록 했는데 이는 아무리 가물어도 나무가 마르지 않도록 했던 겁니다. 요 밑에 가면 농사를 짓는곳에 물을 사용할 수 있도록 했어요, 대단한 지혜가 담겨져 있죠."

함양 상림에 대해 전해오는 전설이 많다. 그중 한 가지를 정해봤다. "상림 숲에는 개미, 개구리, 뱀 등 양서류나 곤충류가 없습니다. 최치원선생이 숲을 조성했을 때 최치원의 어머니가 산책을 나왔는데 뱀을 발견하고 깜짝 놀라 집에 가서 최치원에게 얘기를 했데요. 그랬더니 최치원이 글을 써서 상림에 와서 주문을 외어서 흉물들을 없앴다고 전해집니다. 그게 사실인지 지금까지도 개미, 개구리, 뱀이 없어요." "여기 세워진 정자가 사운정(思雲亭)입니다. 조선말기 1900년대의 박정규라는 사람이 군수로 왔었는데 치정을 잘 했다고 해요.

그분이 최치원을 생각하며 지은 것입니다. 원래는 모현정(慕賢亭)으로 불렀는데 나중에 지금과 같이 '사운정'으로 바꾸었어요." 그는 상림을 두고 봄에는 나뭇잎이 펴서 좋고 여름에는 피서하기 좋고 가을에는 단풍이 좋고, 겨울에는 눈이 오면 나무마다 눈꽃이 펴서 좋다고 설명했다.

최치원
최치원에 대한 기록이 궁금했다. "최치원은 12살 때 혼자 당나라로 유학을 떠났어요. 18살 때 중국에서 과거에 합격해 지금으로 말하면 면정도의 도시에서 부면장을 했다고 합니다. 당시 명칭으로 관역순관이란 벼슬을 하였는데 그때 '황소의 난'이 일어났어요. 황제가 장안을 빼앗기고 피난을 가는 상황이 벌어졌는데. 그때 최치원이 격문을 써서 황소에게 보냈어요. 황소가 읽다가 너무 놀라서 침상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는 일화도 그때 일이었죠." "중국 양주에 가면 최치원을 기리는 사당이 있어요. 외국인인데도 존경을 받고 있죠. 사실 전쟁을 해서 싸웠으면 수많은 희생이 불가피한데 글로써 반란군을 평정했다고 해서 중국인의 존경을 받은 거죠."

말년에 은둔을 결심한 최치원이 경주 남산, 지리산 쌍계사, 동래 해운대 등에 발자취를 남겼지만, 정착 태수로 지냈던 함양에는 그의 흔적이 없다. "이곳에 계시다가 합천 해안사로 가셨는데 이곳에는 그의 발자취가 없어요. 전설로만 전하지. 최치원이 함양에 태수로 있었다는 것은 '박로태감천령군태수최치원'이란 기록에서 알 수 있을 뿐이죠."

함양의미래
그는 함양의 빼어난 자연환경을 강조했다.
"함양은 지리산 정기를 받아서 많은 인물이 났고 유명한 고장이 되었어요. 장수하는 분도 많지요. 국내에서 보기 드문 청정지역으로도 유명하죠."

"함양에선 예부터 약초가 많이 났어요. 산청에 유의태가 살았다고 해서 약초를 강조하지만 사실 약초는 함양이 본고장입니다. 산삼축제도 함양에서 열리고 있어요."

"옛날 전설에 중국 진시왕이 서복을 보내 불로초를 가져오게 했는데 서복이 하동에서 구례를 거쳐 칠선계곡 입구의 서암정사 옆의 서암동에 머물렀어요. 지리산 약초가 바로 이곳 삼봉산에 많았기 때문입니다. 유의태, 허준도 이곳 삼봉산에서 약초를 캤다고 전해지고 있어요."

"함양에선 화림동계곡이 참 좋았어요. 지금은 마을이 들어서고 논밭을 개관해 경관이 훼손되었지만 옛날엔 반드시 들러야 하는 코스로 유명했어요. 함양 8경의 하나이기도 합니다." 함양8경은 상림사계, 금대지리, 용추비경, 화림풍류, 칠선시류, 서암석불, 덕유운해, 대봉산출쭉 등이 해당된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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