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01_천은사_구간소개
지리산 노고단 가는 한적한 도로의 길목에 호젓하게 들어앉은 천은사. 천은사, 화엄사, 연곡사의 구례 3대 사찰 중에서 천은사는 아름다운 풍경으로는 단연 으뜸이라고 할 만한 사찰입니다. 828년, 신라 흥덕왕 3년에 인도에서 온 ‘덕운스님’이 우리나라의 명산을 두루두루 살핀 끝에 지리산에서 천은사를 세웠다고 합니다. 고려 후기 충렬왕 대에는 ‘남방제일선원’으로 지정될 정도로 번성하여 선찰로서 명성이 자자했다고 해요. 천은사에 딸린 암자, 수도암은 고려에서 가장 뛰어난 선승들로 숲을 이룰 정도였다고 합니다. 각지에서 선승이 모여들었던 시대적 흐름과 연관이 있을까요? 천은사에는 고려 공민왕의 국사였던 나옹화상이 한동안 머물다 선물하고 갔다는 ‘불감’이 보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불감’이란 아주 작게 축소한 불교 건축물의 모형이라고 할 수 있지요. 높이가 43cm 정도 밖에 안 되니 정말 작지요? 개인용으로 가지고 다니며 기도하기에 참 편리했을 것 같습니다. 작은 방 안에 앉아, 불감의 여닫이 문을 가만히 열어, 부처님의 자애로운 미소를 바라보며 합장하는 늙은 선승의 모습이 그려집니다. 나옹화상과 같은 큰 스님이 무슨 이유로 지리산의 작은 암자에 머물고 불감을 남기게 되었는가는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망해버린 나라의 국사였던 까닭에 지리산 깊은 사찰로 피하여 몸을 의탁하기라도 했었던 걸까요? 안타깝게도 천은사의 역사는 상당부분 공백으로 비워져 있습니다. 조선시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 앗아간 것은 천년 고찰의 전각뿐만이 아니었던거죠. 왜군의 광포한 손길에 천은사의 역사 기록마저도 모두 불타 재로 사라져버리고 말았으니까요. 불타버린 천은사는 그 후 여러 차례 다시 재건되지만, 잇따른 화마로 인해 다시 주저앉고 마는 비운을 겪습니다. 현재 천은사의 대부분의 목조건물들은 조선 영조 대인 1774년에 혜암 선사가 세웠다고 전해집니다. 현판의 글씨는 동구진체로 유명한 원교 이광사 선생이 썻습니다. 조선시대의 명필 추사 김정희 선생과 쌍벽을 이루었던 명필이죠. 잃어버린 역사를 못내 아쉬워하며 일주문을 향해 발걸음을 떼자니, 일주문 진입로 오른편 아름다운 금강송들 사이로 살짝 살짝 보이는 ‘승탑전’으로 자꾸만 시선이 갑니다. 잠시 올라보면, 담장 너머로 아름드리 금강송이 서로 어울려 춤추며 병풍을 둘러 ‘승탑전’을 감싸 안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스님들의 사리를 모시는 역할을 하는 승탑. 천은사에는 조선후기의 승탑이 대부분인데요, 키 작고 소박한 탑들을 보니 부귀영화를 뒤로하고 산속에서 두문불출하며 수도에만 정진했을 선승들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일주문을 향하여 발을 내딛으려니 시끄러운 자동차 소리 대신, 이따금씩 구슬픈 곡조를 뽑아내는 깊은 산 속의 새소리, 마음을 어르는 구수한 불경소리가 맑은 계곡물 소리에 실려 들려오기 시작합니다.
일주문
일주문
1. 02_천은사_일주문
1. 02_천은사_일주문
큼직한 기와지붕을 이고 선 천은사 일주문 앞에 서니 마음이 평온해 집니다. 미풍에 살랑살랑 일렁이는 나무들은 이제 모든 잡념을 내려놓고, 일주문으로 들어가자고 정겹게 속삭입니다. 일주문. 육중한 두 다리로 잘 가누고 떡하니 버티고 서서, 제 몸보다 수십 배나 무겁고 큰 지붕을 이고 있다고 하여 ‘일주문’이라고 한답니다. 천은사의 일주문을 가만히 보고 있자니 끊임없이 정진하자고 청하는 선승의 모습같이 느껴지네요. 일주문의 현판에는 ‘지리산 천은사’라고 유려한 글씨체로 씌여 있네요. 천은사는 예전에 감로사라 불렸다 하던데, 어떤 사연으로 이름이 바뀐 걸까요? 한자로 보아 ‘샘’과 연관이 있는 것 같은데, 자세한 이야기를 문화관광해설사님의 설명으로 들어보도록 하지요.
“예전에 이 절에는 감로천이라는 샘이 있었대요. 달디 단 이슬같은 물은 흐렸던 정신을 맑게 하여 주고, 영험한 약효까지 있다는 입소문에 사방에서 스님들이 구름같이 모여들었다고 하네요. 그래서 한때는 1,000명이 넘는 스님이 천은사에 머물기도 했대요.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그 샘에 구렁이가 자꾸 출몰해서 사람들을 놀래켰답니다. 그래서 누군가 그 구렁이를 잡아 죽였는데, 그 후부터 이상하게도 샘이 말라 버렸대요. 샘이 숨어 버린 거죠. 그 뒤로 절에는 화재가 끊이지 않았는데, 사람들은 샘을 지키는 구렁이를 잡아 죽여서 부정을 탄 것이라 수군거리기 시작했답니다. 그러던 어느날 조선시대 4대 명필 중 하나로 손꼽히는 원교 이광사가 이 사연을 듣고 딱하게 여기게 되요. 그는 물이 흐르는 듯한 유려한 필체, 그러니까 ‘수체’라고 불리는 필체로 ‘지리산 천은사’라고 현판에 써서 걸게 합니다. 샘이 숨어버린 절이라는 뜻인데, 그게 새로운 절이름이 되버린 거죠. 그런데 그 글씨가 ‘수기, 그러니까 물의 기운’를 다시 불어넣었던 모양이예요. 희한하게도 그 뒤로는 더 이상 화재가 일어나지 않았다고 해요. 요즘같은 세상에 들으면 허무맹랑한 이야기에 지나지 않죠. 하지만 나무, 불, 흙, 쇠, 물 같은 오행에 깃든 보이지 않은. 물질 이면의 흐름까지 감지했던 옛사람들의 마음으로 보면 옛건축에 불어넣는 그들의 혼까지 읽어낼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
설명을 듣고 일주문에 올라서니 세찬 물소리가 귓바퀴를 휘감고 돕니다. 천은사의 계곡이 가까워져서 그럴까요? 아니면 그 옛날 전설대로 천은사 현판에 정말 물이 기운이 흐르고 있기 때문일까요?
수홍루
수홍루
1. 03_천은사_수홍루
1. 03_천은사_수홍루
일주문을 통과해 몇 걸음 떼자니 맑고 세찬 계곡물 소리가 점점 더 커집니다. 천은사 계곡을 휘감아 흐르던 계곡물은 이내 수홍루를 지나 ‘천은제’ 저수지로 들어와 몸을 풉니다. 천은제의 고요한 수면은 천은계곡의 짙푸른 녹음을 거울마냥 그대로 비추어 담아, 그 작은 품속에 넓은 천은 계곡도, 광대한 하늘도 너끈히 품어 버립니다. 물길을 따라 눈길을 돌리면 계곡 위로 놓인 무지개 다리 ‘홍교’ 위로 ‘수홍루’가 올라앉아 ‘천은제’를 내려다보고 있습니다.수홍이라 하면 무지개가 드리워져 있다는 뜻입니다. 여름이면 소나기가 내린 뒤에 아름다운 무지개가 이 계곡 위로 걸치곤 하니, ‘수홍루’라는 이름이 정말 허투루 붙은 이름은 아니네요. 이렇게 눈이 호강을 할 때면 '아름답다, 좋다‘는 말로는 너무도 부족하여, 주섬주섬 아는 단어들을 가려 뽑아 제대로 심정을 표현해보고 싶기 마련이지요.
천은사의 수려한 풍광과 감로천의 전설은 그 옛날 많은 시객들의 시심을 흔들어 놓았던지, 천은사의 아름다움을 읊은 한시가 다수 전해오고 있습니다. 그들의 눈에 비친 천은사는 어떠했을까요? 1983년에 천은제가 들어섰으니 그 때는 저수지가 없었을 것이고, 꼬불꼬불 산길을 걸어들어 오다가 만난 그 옛날의 ‘수홍루’는 지금보다 더 고색창연한 얼굴빛으로 길손을 반겨주었을 것입니다. 조선 후기 ‘최연’이라는 선비는 천은사를 어떻게 느끼고 있었는지, ‘감로사에서’라는 그의 한시 한 편을 감상해보도록 할까요?
암자에서 수도하며 열흘을 머물다 감로사로 돌아와 속세를 멀리해 자연과 벗하고 있네 산 꽃이 다 지니 섭섭함이 크나 신록이 그늘을 지어 그윽함이 있네
시도 한 수 즐기며 계곡물 소리를 풍악소리 삼아 천은제 푸른 물빛에 취해있자니, 도무지 천은사에 샘이 말라 물이 귀했다는 이야기가 믿기지 않을 정도입니다. 말라버린 감로천의 역사와 몇 차례 화재의 기억이 사무쳤던 것인지 수홍루 저 앞의 돌로 된 커다란 수조에는 맑은 물이 그득하고, ‘감로천’이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습니다. 원교 이광사의 현판 글씨가 천은사의 물기운을 터도 정말 제대로 텄던 것일까요?
사천왕문
사천왕문
1. 04_천은사_사천왕문
1. 04_천은사_사천왕문
제법 긴 계단을 올라가야 천은사의 사천왕문을 만날 수 있습니다. 경내로 들어가는 마지막 관문인 사천왕문. 사천왕들이 산다는 전설속의 수미산 중턱을 상징이라도 하듯 높은 대 위에 서서 저 아래 발치의 인간세계를 굽어보고 있습니다. 사천왕은 불국토의 동서남북 네 방위와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을 지키는 문지기 수호신입니다. 원래는 인도신화에서부터 존재했던 호법신이었는데, 석가모니 부처의 설법을 듣고 반해서 불법을 지키는 수호신이 되기로 맹세했다고 합니다. 다른 사찰에서 보던 색감보다 사천왕들이 좀 세련되었다는 느낌이 들지요? 전통적으로 원색의 색감을 잘 살린 단청 채색 스타일이 아닌, 불화를 그릴 때 쓰는 채색법으로 옷을 입혔다고 해요. 색이야기를 하기 전에 음향오행설에 의해 풀어낸 오방색에 대해 간단히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오방색은 동, 서, 남, 북, 중앙의 위치를 의미하는 5가지의 색입니다. 사천왕들의 얼굴색이 각기 다른 것을 보면 오방색과 연관이 있지 않을까요? 오른쪽으로 나란히 앉은 ‘북방 다문천왕’이 검은색 얼굴, ‘동방 지국천왕’이 푸른색 얼굴을 하고 있고, 왼쪽으로 ‘남방 증장천왕’이 붉은빛을 띤 얼굴, ‘서방 광목천왕’이 흰빛의 얼굴을 하고 있어 각각 오방위의 색과 일치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천왕문을 조성하면서 동서남북과 중앙에 해당하는 색, 즉 청색, 흰색, 붉은색, 검은색, 황색의 오방색까지도 일치시켜보려고 염두에 둔 모양입니다. 황색이 없다고요? 황색은 중앙의 색깔이기 때문에 네 방위에서는 빠지겠지요. 사천왕들은 저마다 손에 비파, 칼, 용, 창검, 보탑 등을 들고, 일제히 두 눈을 부릅뜨고 사찰 안으로 악귀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철통같이 엄호하고 섰습니다. 사천왕들의 경호는 일체의 작은 틈도 없나보네요. 몰래 신성한 경내로 침입하려다 걸린 악귀들은 이미 사천왕들의 큼직한 발 아래 짓밟혀 고통스런 표정을 짓고 있으니 말이죠. 그런데 다른 사찰의 ‘천왕문’과는 달리 눈에 띄는 특징이 있습니다. 벌써 눈치 채셨다고요? 다른 사찰과는 달리 천왕문은 현판이 없습니다. 왜 그렇게 남겨두었을까요? 천은사 불전들의 현판은 이광사를 위시로 해서 창암 이삼만, 염재 송태회 같은 당대 쟁쟁했던 명필들의 글씨로 유명합니다. 아마도 천왕문은 이광사 같은 천하명필이 나타날 때까지 이름표를 달지 않겠다고 점잖은 투정을 부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보제루
보제루
1. 05_천은사_보제루
1. 05_천은사_보제루
천왕문을 지나, 보제루의 오른쪽 허리를 끼고 돌아 중심영역으로 들어갑니다. 보제루는 후면에서 보면 2층을 갖추고 책을 반쯤 펴놓은 듯한 팔(八) 자모양의 맞배지붕의 누각 입니다. 하지만 앞에서 보면 단층 전각의 모습을 하고 있지요. 이러한 양식이나 오른쪽으로 돌아 들어가는 모양새가 천상 화엄사의 보제루와 닮아 있으니, 화엄사 밑에 소속된 작은 사찰인 천은사가 화엄사 보제루를 본 따 지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천은사 보제루의 일층 누각은 기둥들이 모두 문과 벽으로 막힌 까닭에 누각이라는 말이 좀 무색하기도 하네요. 일반적인 보제루는 1층이 탁 트이고 루의 기둥이 높으며, 그 사이로 누각 밑을 통과해 대웅전으로 나아가게 되어있거든요. ‘보제루’는 두루 모든 중생을 제도한다는 의미로, 사찰의 주요 법회 의식은 이곳에서 행하여 집니다. 보제루와 극락보전이 마주보고 선 양 측면에는 설선당과 회승당 두 ‘요사채’가 시중을 들 듯 서 있습니다. 요사채란 부처님의 불상을 모신 예불공간이 아닌, 스님들이 수행하고 생활하는 공간을 말합니다. 부처님을 모신 불전을 마주보며 드나든다는 것이 불경스러웠던지, 주 출입구를 중심마당 쪽에 두지 않고 그 바깥 쪽에 두어 중심공간의 성스러움을 배려하고 있습니다. 설선당과 회승당의 차분한 지붕선을 따라서 시선을 옮기다 보니, 보제루 양쪽 지붕과 접하는 설선당과 회승당의 지붕 모양에 시선이 머뭅니다. 자신들은 대칭을 이루지 못할망정, 보제루를 먼저 배려한 모양새가 느껴집니다. 가만히 살펴보니 설선당의 왼쪽편은 맞배지붕 모양을 갖추었지만, 오른쪽 지붕은 보제루와 부대끼는 것을 피하려 했던지 한쪽 어깨를 한껏 낮춘 변형된 모양새를 하고 있습니다. 몸을 낮추어 예불공간을 높이는 두 설선당과 회승당의 미덕 때문인지, 이심전심 말이 필요 없이 부처님의 마음을 느낄 수 있는 공간입니다. 잠시 보제루 툇마루에 앉아서 천천히 주위 풍경도 바라보고, 사색에 잠겨보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도 좋겠지요. 해가 뉘엿뉘엿 지기라도 하면, 옛 나그네의 심금을 울린 아름다운 산사의 종소리에 나도 모르게 시인이 되어 시 한수를 읊조리게 되지 않을까요.
보리수
보리수
1. 06_천은사_보리수
1. 06_천은사_보리수
설선당과 명부전 사이에 큰 나무 한 그루가 서 있습니다. 무슨 나무냐고 물어보는 사람이 많았던 모양입니다. 스님이 기와장 위에 ‘보리수’라고 큼직하게 써서 나무 밑둥에 기대어 놓은 모양이 정겹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는 보리수 나무 아래서 깨달음을 얻었다지요. 그럼 인도의 보리수도 천은사의 보리수를 닮았을까 궁금해집니다. 인도의 보리수 나무는 꼭 어린왕자에 나오는 거대한 바오밥 나무처럼 생겼답니다. 왜 우리나라와 인도의 보리수 나무는 서로 닮지 않은 걸까요?
아하, 보리수는 나무의 종류가 아니라 ‘깨달음의 나무’라는 뜻이라는 군요. 보리수의 ‘보리’는 고대 인도어의 ‘보드히’(bodhi), 즉 ‘깨달음’이란 말에서 유래되었다고 합니다. 부처(Buddha)라는 단어도, ‘부드흐’(budh), 즉 ‘깨닫다’라는 동사에서 나온 말이라고 하니, 보리수와 부처는 같은 뿌리에서 생겨난 형제 자매같은 단어들이군요.
보리수는 나무의 수종보다는 불교적인 의미를 중시해서 나라마다 다른 모양입니다. 천은사의 보리수는 피나무 종류의 염주나무라고 합니다. 아마도 염주를 돌리며 열심히 수행에 정진하기 때문에 깨달음 나무로 통하게 된 것 같아요. 천은사의 보리수 나무는 열매가 동그랗고 색이 고와 염주로 만들어, 만지면 만질수록 윤이 나서 스님들 사이에서는 천은사 보리수 염주를 얻는 게 큰 영광으로 여겨질 정도라고 합니다.
천은사에서 가장 나이 많은 이 보리수 나무는 200살 정도 되었습니다. 얼마 전까지 할아버지뻘 되는 커다란 보리수 나무가 있었지만, 아쉽게도 사찰 경내를 정리할 때 베어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 보리수처럼, 할아버지 보리수의 자손들이 사찰 곳곳에서 자라고 있다니 전통을 소중히 하는 스님들의 마음이 느껴지는군요.
천은사의 보리수 나무 자손은 천은사 경내뿐만 아니라, 전국 곳곳에 분양되어 자라고 있답니다. 2009년에는 조계종의 총본산인 조계사의 경내에 천은사의 보리수 자손을 기념식수로 심었다고 합니다. 깨달음을 향해 정진하자는 의미가 담겨 있었지요. 자, 이정도면 천은사 보리수 자랑 할만 하지요?
극락보전
극락보전
1. 07_천은사_극락보전
1. 07_천은사_극락보전
많은 사찰에서 대웅전을 제일 중심에 두지만, 천은사에서는 극락보전을 중심 불전으로 삼고 있습니다. 극락보전에 모셔진 부처님은 서방정토의 극락세계를 다스리며, 사람들이 극락세계에 다시 태어나도록 인도하는 부처라고 합니다.
천천히 극락보전 앞에 서니, 아미타 부처의 불상이 한 쪽 손을 다소곳이 들어 반갑다고 인사하는 듯 합니다. 엄지와 중지를 동그랗게 맞붙여서 부드럽게 들고 있는 저 손 모양이 설법을 할 때 취하는 포즈라네요. 그런데 아미타부처의 머리 위로 똑같은 자세를 하고 있는 부처의 그림이 눈에 뜨입니다. 이렇게 불상 뒤에 배경그림같이 걸어놓는 불화를 ‘후불탱화’라 부른다는데, 마음에 드는 그림을 자유롭게 그리는 게 아니라, 불상과 똑같은 부처의 그림을 붙인다는군요.
1776년에 그려진 이 아미타후불탱화는 보물로 지정되어 있답니다. 청색과 녹색의 밝고 선명한 색채를 사용하고, 자세히 보면 부처, 보살, 사천왕의 옷에는 섬세한 무늬와 장식을 표현하여 18 세기 불화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합니다.
아미타부처가 수많은 이들에게 둘러싸여 사리불존자에게 설법하는 모습을 표현하고 있답니다. 가운데 제일 큼지막하게 그려진 부처가 아미타 부처라는 것은 알겠는데, 어휴, 등장인물이 너무 많아서 누가 누군지 전혀 종잡을 수가 없네요! 아마도 사찰을 찾는 많은 분들이 같이 마음이었던 모양입니다. 그 답답함을 속 시원히 풀어주고 싶었던지 이 불화를 그린 스님은 아주 독창적인 시도를 합니다. 인물상마다 빨간 세로 띠 상자를 조그맣게 그려놓고 일일이 이름을 적어 넣어 누구인지 알려주고 있는 거죠. 이렇게 친절히 등장인물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표기하고 있는 불화는 아주 귀중한 사례라서, 불화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고 하네요.
후불탱화를 바라보다가, 양 옆의 기둥에서 재미있는 동물들을 발견했습니다. 양쪽 기둥 위편에서 아래쪽으로 타고 내려오는 해태와 수달이 보이시나요? 해태는 예로부터 불기운을 막는다고 알려져 왔지요. 서울 광화문 양 옆에 관악산의 화기를 잠재운다고 해태상을 세워 놓은 것은 유명한 일화죠. 반대편에는 입에 물고기를 덥석 물고 있는 수달이 기둥을 타고 내려오고 있는 모습이 익살맞습니다. 섬진강 수달을 여기서 만날 수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습니다. 그 옛날 명필 이광사뿐만 아니라 이 해태와 수달도 화재를 막는데 힘을 보태달라고 천은사 스님들의 초대를 받았던 모양입니다.
괘불지주
괘불지주
1. 08_천은사_괘불지주
1. 08_천은사_괘불지주
극락보전 앞으로는 키 작은 돌 기둥 두 개가 단촐하게 서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 기둥을 ‘괘불지주’라고 합니다. ‘괘불’은 걸개그림용 불화를 말하고, ‘지주’는 지탱해 주는 기둥이란 뜻이니, ‘걸개그림용 불화를 지탱해 주는 기둥’이라는 뜻이군요.
자, 함께 상상 속에서 불화를 내걸어볼까요? 먼저 저기 두 쌍의 지주마다 10m 높이의 장대를 가운데 틈새에 곧추 세우고 끈으로 단단히 고정시키세요. 그리고 잘 모셔둔 ‘괘불’을 펼쳐 끈으로 잘 연결해 천천히 높이 끌어 올려서 잘 펼쳐지도록 고정시킵니다.
그럼, 이제 부처님을 내어 모셨으니 정성껏 제단을 차리고 법회를 열어볼까요? 많은 사람들로 빼곡히 들어 찬 마당에서 예불소리가 울려 퍼지니 간절한 표정으로 합장한 사람들의 얼굴에는 평온한 미소가 감돌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야외에 단을 차리고 상서로운 법회를 여는 자리를 ‘야단법석’이라고 한답니다. 숭유억불 정책을 썼던 조선시대의 시대적 풍토 때문인지 비하되어, 지금은 소란스럽고 떠들썩한 사람을 꾸짖으며 쓰게 되었지만요.
법회의 자리에 주인공인 부처님을 빼놓을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불전 안의 부처님 불상을 들어 내오자니, 옮기기도 무겁고 깨질 염려도 있고 참 난감합니다. 그렇다고 그 많은 사람들이 저 작은 극락보전 안으로 들어갈 수도 없는 노릇이구요. 그래서 고안해 낸 방법이 바로 부처님을 그린 괘불탱화 랍니다. 보물로 지정되어 있는 천은사의 괘불은 여러 불보살과 신중들을 모두 그려놓은 그런 불화가 아닙니다. 석가모니 부처 홀로 우뚝 서서 대중을 내려다보고 있는 그런 그림입니다. 이전에는 볼 수 없던 이런 괘불탱화가 왜 조성이 되었는지 궁금하네요. 이유를 들어보도록 할까요?
“괘불탱화는 임진왜란 이후인 17세기 초부터 집중적으로 제작되기 시작합니다. 이 시기에 괘불을 걸어 놓고 대규모 법회를 열 일이 많아진거죠.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전쟁에서 부모형제, 친지를 잃은 백성들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을 거예요. 불교를 탄압하던 나랏님도 전쟁 중에 백성을 보호하지 못하고, 피난 다니느라 바빴지요. 당시 전쟁으로 조선 인구의 3분의 1이 줄어들었다고 해요.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백성들의 마음을 달래 줄 수단이 절실했죠. 그 때 불교가 사십구재나 수륙재 등의 의식을 통해서 전쟁 중에 목숨을 잃고 물과 육지를 떠도는 영혼을 극락으로 인도하는 제를 지내서 민심을 수습하게 되지요. 나랏님도 울며 겨자 먹기로 사찰에 수륙제를 지내도록 권장을 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100년 동안에만 전국적으로 21점의 괘불탱화가 조성이 돼요. 처음에는 저 극락보전 안의 후불탱화에서처럼 부처님은 평안히 많은 이들에 둘러싸여 앉아 있는 그림을 썼을 거예요. 그런데 대형 야회 법회에서는 그러한 조그만 부처님으로는 백성의 갈증을 풀어줄 수 없었겠지요. 사람들은 무엇이든 해결해 줄 수 있는 당당하고 위엄있는 부처님의 모습을 열망하죠. 그래서 부처님 홀로 커다란 화폭을 다 차지하는 불화가 등장을 해요. 또 그것만으로도 부족하여 괘불의 부처님은 더 높은 곳에서 중생을 굽어보겠다는 적극적인 의지로 천은사 괘불의 석가모니처럼 벌떡 일어서게 된 거죠.”
사연을 듣고 나니, 소박하기 그지없는 괘불지주 앞에 극락보전의 두 배도 넘는 키다리 부처님이 우뚝 서서, 일제히 예불을 합창하는 백성들을 지긋이 내려다보는 모습이 선합니다.
삼성전,관음전, 팔상전
삼성전,관음전, 팔상전
1. 09_천은사_삼성전,팔상전,관음전
1. 09_천은사_삼성전,팔상전,관음전
극락보전의 왼편허리를 끼고 옹기종기 불전들이 모여 있는 극락보전 뒷마당으로 발걸음을 옮깁니다. 그런데 마당 한가운데에 커다란 거북이 같은 바위 하나가 관음전, 팔상전, 삼성전 등을 향해 이마를 땅에 대고 공손히 절을 올리는 듯한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얼마 전까지 그 위에는 조그마한 석탑이 올려져 있었으나, 본래 없었던 것을 누군가 올려두었다 하여 10 여년 전에 사찰에서 치워버렸다고 합니다. 원래 저 커다란 바위는 전기불도 없던 시절 사찰에 불을 밝히는 석대였다고 합니다. 그 위에 관솔, 즉 송진이 많이 엉기어 있는 소나무 가지를 모아 쪼개어 얹어 놓고 밤새 사찰을 밝혔던 바위였지요. 지금부터 반세기 전만 해도 시골에서 귀한 촛불이나 석유로 야외에 불을 밝히는 광경은 거의 볼 수 없었지요. 그 시절에는 관솔불로 어둠을 밝혔다고 합니다. 다른 절에서는 자연석을 쓰지 않고, 반듯하게 깎아서 만든 석대에 밤새 불을 밝혀 놓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전기 등불이 흔해져서 심지어 석가탄신일의 연등불도 전기로 밝히는 요즘 세상에 참 격세지감이 느껴지는 이야기입니다. 한 때 포크레인을 동원해 들어낼까 고민도 했다지만, 고민 끝에 천은사 스님들은 그 바위 돌을 치우기보다 절의 역사로 간직하기로 하여 그대로 두게 되었다고 합니다.
바위 앞쪽으로는 여러 불전들이 띄엄띄엄 떨어져 앉아있습니다. 부처님의 제자인 16나한을 모신 응진전. 부처님의 일대기를 담은 여덟 폭의 그림을 모신 팔상전. 천개의 눈과 손으로 중생의 어려움을 두루 살피는 천수천안 관세음보살을 모신 관음전. 불교로 흡수된 토속 신들인 칠성신, 산신, 독성을 모시는 삼성전. 이 좁은 뒷마당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전각들의 중심을 잡아주는 것은 아무 형상도 갖지 않는 바위가 아닐까요? 어느 석공의 손을 빌어 귀하디 귀한 불보살의 아름다운 모습이나 번듯한 탑의 모양으로 새 생명을 얻지는 못하였으나, 불심만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는 듯이 보입니다. 자기 앞에 늘어선 불전들을 향하여 공손히 엎드려 불을 밝혀 주는 이 바위야 말로 이 공간의 조화를 빚어내는 아름다운 존재가 아닐까요?
천은사를 둘러보는 동안 마음 속의 번잡한 잡념들을 모두 씻어낸 듯 맑아진 느낌이 듭니다. 지리산 노고단에서 시작된 세찬 바람은 어느새 살랑대는 솔바람이 되어 속세의 때를 씻고 맑아진 우리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속삭입니다. 잘 가라고, 문득 생각나는 날에 다시 찾아오라고......